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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주제 포기

HTS3 2026. 4. 6. 18:00

 

연구를 시작할 때 나는 종종 새로운 아이디어가 주는 흥분에 먼저 끌렸다. 문제를 수학적으로 정식화할 수 있고, 모델 구조도 떠오르고, 구현의 윤곽도 보이면 이미 절반쯤은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discrete action과 continuous action을 함께 순차적으로 생성하는 policy를 설계하고, 이를 Dubins TSP에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문제는 분명 흥미로웠다. 방문 순서라는 이산적 결정과 heading angle이라는 연속적 결정을 한 모델 안에서 함께 다루는 그림은 아름다워 보였다. 한동안은 그 구조 자체가 연구의 충분한 이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자 다른 질문이 생겼다. “이 문제가 정말 지금 내가 시간을 쏟아부을 만한 문제인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과, 박사과정의 소중한 시간을 걸 가치가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 차이를 인정하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내가 관심을 둔 설정은 single vehicle Dubins TSP였다. 그런데 이 문제에는 이미 WiSM 같은 강한 기준점이 있었다. WiSM은 단순히 점수만 잘 나오는 기법이 아니라, 문제의 구조를 정교하게 반영한 강력한 solver였다. 이런 베이스라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내가 기대할 수 있는 승부는 대개 세 가지였다. 조금 더 좋은 해를 찾거나, 조금 더 빠르게 풀거나, 조금 더 큰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얼핏 보면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목표처럼 보인다. 그러나 곧 나는 불편한 사실을 마주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적어도 내가 그릴 수 있는 응용 시나리오 안에서는 결정적으로 설득력 있지 않았다.

 

먼저 일반화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물론 neural combinatorial optimization에서 generalization은 그 자체로 중요한 주제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굳이 Dubins TSP에 내 연구를 묶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정말 다루고 싶은 것이 generalization이라면, 더 핵심적이고 더 넓게 인정받을 수 있는 문제들이 따로 있을 것이다. Dubins TSP는 그 질문을 담는 하나의 무대일 수는 있어도,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무대는 아니었다. 문제를 사랑하는 것과 문제에 매달리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여기서 배웠다.

 

속도에 대해서도 비슷한 회의가 생겼다. WiSM보다 빠르게 풀 수 있다는 주장은 분명 매력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연구는 “빠르다”는 형용사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느 정도의 스케일에서, 어느 정도의 시간 예산 아래, 무엇을 위해 빨라야 하는지가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나는 재계획이 중요한 상황을 떠올려 보았고, fixed-wing UAV가 많은 포인트를 대상으로 매우 짧은 시간 안에 반복적으로 풀어야 하는 실제 사례가 있는지를 자문했다. 그러나 그 필요성이 내 안에서 명확하게 자리 잡지 않았다. “혹시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정도로는 논문 한 편을 쓸 수 있어도, 남은 박사과정의 시간을 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지점에서 나는 이 주제를 포기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포기가 패배처럼 느껴졌다. 어렵게 세운 아이디어를 내려놓는 일은 언제나 자기부정처럼 다가온다. 특히 구현까지 가능한 그림이 보일 때는 더 그렇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번 포기가 무기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분별에서 나온 결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연구에서는 끝까지 버티는 힘만큼이나, 잘 접는 힘도 중요하다. 어떤 문제는 어렵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시간을 써도 남는 것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것을 얻었다.

 

가장 먼저 얻은 것은 아이디어를 보는 새로운 기준이다. 예전의 나는 “재미있고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꽤 오래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걸음 물러서서 물었다. 이 아이디어가 정말 필요한가. 강한 베이스라인을 상대로 겨룰 이유가 충분한가. 내가 조금 이겨도 연구적으로 남는 것이 있는가. 응용 측면에서 꼭 해결되어야 하는 병목인가. 이 질문들은 아이디어를 꺾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지켜 주기 위한 질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좋은 연구는 가능성만으로 커지지 않고, 필요성 위에서 자란다.

 

또 하나 얻은 것은 강한 베이스라인을 대하는 태도다. 예전에는 좋은 baseline이 있으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곧 연구의 목적이라고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본다. 강한 baseline은 나를 막는 벽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서 가치가 생기는지를 알려주는 기준점이다. baseline이 너무 강해서 정면승부의 의미가 작다면, 문제는 “어떻게 이길까”가 아니라 “어디에서 다른 가치를 만들까”가 된다. 그 가치가 없다면, 과감하게 떠나는 편이 낫다. 이 단순한 사실을 몸으로 이해한 것은 생각보다 큰 수확이다.

나는 또한 문제 설정과 실제 세계 사이의 거리를 조금 더 민감하게 보게 되었다. 이론적으로 흥미로운 설정과 실제로 절실한 설정은 자주 어긋난다. 특히 조합최적화와 학습이 만나는 영역에서는, benchmark 위의 개선이 실제 시스템에서의 필요성과 자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제 나는 어떤 문제를 보더라도 먼저 묻게 된다. 이것은 진짜로 누구를 위해 중요한가. 이 질문에 선명하게 답하지 못한다면, 성능 향상 그래프가 아무리 예뻐도 마음 한구석은 계속 불편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번 포기를 통해 내 연구 취향을 조금 더 또렷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단순히 어려운 문제를 푸는 데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왜 이 문제가 지금 여기서 중요한지를 납득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 말이다.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일 자체보다, 그 모델이 기존 접근으로는 잘 다루지 못하는 어떤 본질적 틈을 메운다는 확신이 있을 때 더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앞으로의 주제를 고르는 데 큰 기준이 되어 줄 것이다.

 

포기한 주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종종 다음 선택의 기준이 된다. 이번에 내려놓은 Dubins TSP 아이디어도 그렇다. 나는 여기서 hybrid autoregressive policy라는 흥미로운 관점을 보았고, 강한 고전적 방법론과 학습 기반 접근이 만날 때 어떤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하는지도 배웠다. 비록 이 주제는 접었지만, 그 안에서 얻은 문제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 더 적절한 문제를 만났을 때, 지금 떠올렸던 아이디어는 다른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연구에서 포기가 끝이 아니길 바라며. 때로는 방향 잃은 열정을 정리하고, 더 오래 남을 질문을 찾아가기 위한 과정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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